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바그너 (문단 편집) == 반유대주의 논란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Wagnerbelike.jpg|width=100%]]}}}||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바그너의 사회진화론적 관점을 풍자한 그림. 뿔나팔을 부는 유대 랍비의 모습에서 지휘봉을 든 바그너의 모습으로 '진화'하는 것에 빗대었다.}}} || 바그너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 음악가들을 자주 비난했다. 독일 문화에 유해한 이방인적인 요소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그너가 처음으로 공공연히 유대인들을 비난한 에세이는 1850년, 그가 37세 때에 K. Freigedank(K. 자유생각)이라는 필명으로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에 기고한 '음악에서의 유대적 성향'(Das Judenthum in der Musik)이었다. 그의 에세이는 의도적으로 유대인 작곡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증오와 혐오를 설명한 내용으로 바그너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펠릭스 멘델스존]]과 [[자코모 마이어베어]]를 대상으로 삼았다. 바그너는 독일 국민들이 아무리 유대인들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말하고 쓴다고 하더라도 독일 국민들은 그들의 이방인적인 외양과 행동 때문에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음악가들은 천박하고 인위적인 작품만 생산할줄 안다고 전제하고 그것은 그들이 독일 국민들과 진정으로 정신적인 연결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그너는 이 에세이의 결론으로 '유대인들이 저주의 멍에로부터 해방될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성경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처럼 구속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크세르크세스]])왕은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만 총리의 음모라는 것을 깨닫고는 유대인들을 안전하게 해주고 오히려 하만을 벌주었다. 에세이에서는 실제적인 폐지 또는 소멸을 의미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유대인 분리주의자와 유대의 전통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에게 루드비히 뵈르네(Ludwig Boerne: 1786-1837)의 경우를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그는 유대교를 버리고 루터교로 개종하였으며 그후 원래 이름인 레오브 바루크를 루드비히 뵈르네로 개명하였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이처럼 자기부인(또는 자발적인 포기)을 통해 새로운 생산적인 일에 참여할수 있으며 그럴 때에 모두 하나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바그너는 유대인들이 독일 문화와 사회의 주류에 동화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그렇게 된다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수긍을 하였다. 바그너는 유대인에 대하여 처음 발표한 에세이가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자 1869년에 이번에는 자기의 본명을 사용하여 팜플렛으로 다시 만들어 출판했다. 이와 관련하여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공연할 때에 상당수 사람들이 바그너의 유대인에 대한 관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와 비슷한 글을 몇번 더 썼다. 예를 들면 '독일인은 누구인가?'(1878)에도 그런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바그너 자신이 후세의 [[나치즘]]을 미리 내다보고 악극을 만든 건 절대 아니지만, 그가 [[독일 민족주의]]를 그의 작품에서 강조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일례로 "로엔그린"에서 작중의 배경이 독일이 통일된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일 국왕'이라는 용어를 쓰는 등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독일왕이라는 명사 자체는 작중의 배경인 시대에서도 정치적 상황이 어쨌든 간에 실제로 통용되고 있었다. 일찍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에게 독일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지며, 게다가 독일 지역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동프랑크의 왕이 독일왕으로 칭호가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꼭 독일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니체와의 절교의 요인에도 이 독일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깊게 작용했던것 같다. 바그너가 죽은 뒤 그의 후손과 아내가 나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더욱 까이게 되는 점도 있다. 아내인 코지마 바그너(1837~1930)가 1920년대 [[아돌프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만나 사진도 같이 찍고 그를 칭송하였으며 그녀가 죽을 때 히틀러가 애도했으며 나아가 자신이 정권을 잡자 바그너 특설연주회와 같이 바그너 후손들을 초청하면서 더더욱 나치=바그너라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히틀러가 바그너 작품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것은 물론이다. 물론 현재 바그너의 후손들은 그 당시 나치에게 반대했더라면 자신의 조상들도 [[아우슈비츠]]에 갔을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음악 속의 유대적 성향(Das Judenthum in der Musik)[* 이 글은 두 번이나 출판되었는데, 출판할 때마다 바그너의 모든 주변인들이 '''제발 출판하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하자'''면서 '''전 여친과 전 부인'''마저도 극구 만류했다. 심지어 재판했을 때는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아질 때였다.]'을 비롯해 바그너가 남긴 많은 글들은 반유대주의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아주 많은 정치적 모순과 윤리적 불안정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음악적 재능은 지극히 뛰어났지만 인간적으로는 일관되지 못하고 편협하고 고집스러운 점이 많아 적을 많이 만드는 타입이라고 한다. 그래서 혹자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음악 자체로만 볼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영국의 지휘자 [[토머스 비첨]]은 바그너 악극 공연을 비난한 신문사 사장에게 "그럼 당신 신문사에 걸려있는 홀바인(독일의 화가)의 그림을 태워버리시오. 그럼 나도 바그너 악극을 연주 안하리다."라고 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과연 음악은 음악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봐야 하는지는 지금도 논란 중인 문제이다. 다만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그의 철저한 독일 민족주의 사상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거다. 아마도 바그너가 유대인을 안 좋아했던 것은 독일땅에서 수백 년을 살아오고도 독일이라는 국가에 동화될 생각이 전혀 없는 유대계 사회 전반에 대한 것이지 그냥 평범하게 유대계 독일인으로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는 적대감이 없었던 거 같다.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에게는 유대인 친구 또는 동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Hermann Levi)이다. 당시 뮌헨궁정극장의 지휘자였다. 바이에른 국왕인 루드비히의 신임을 받고 있던 지휘자였다. 헤르만 레비는 독일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활동했지만 유대교도로서 생활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랍비였다. 하지만 바그너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헤르만 레비는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휘했다. 처음에 '파르지팔'을 초연한다고 했을 때 루드비히 2세는 헤르만 레비가 지휘를 맡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이 기독교적 내용의 오페라이므로 유대인이 지휘하면 곤란하다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루드비히 왕이 집요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수락할수 밖에 없었다. 헤르만 레비는 '파르지팔'의 초연 지휘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훗날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난 바그너의 시신이 매장을 위해 바이로이트에 도착하여 장례식을 치룰 때에 헤르만 레비는 바그너를 추모하여서 가장 앞에서 운구하였다. 바그너의 이러한 경향에 후손들의 잘못 및 히틀러의 만행이 더해져, 지금도 [[유대인]] 중에서는 바그너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스라엘]]에선 최근까지도 바그너 음악의 공연은 터부시되었다가 그 터부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곡은 2000년에 지크프리트 목가가,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01/jul/09/ewenmacaskill|2001년에]]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연주하기 전에는 금기에 가까웠고[* 1981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일부를 연주하던 중에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상처를 보여주는 소동이 벌어져서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고.] 지금도 큰 차이는 없다. 2018년 8월 31일에는 이스라엘 유명 클래식 음악 전문 방송 ‘보이스 오브 뮤직’은 바그너의 4부작 악극 ‘니벨룽의 반지’ 중 마지막 곡인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Twilight of the Gods)’을 선곡해 방송했다. 해당 음원은 다니엘 바렌보임이 1991년 독일 바이로이트 바그너 음악제에서 지휘한 연주의 녹음본이었다. 그런데 보이스 오브 뮤직을 운영하는 이스라엘 공영 방송 ‘칸’은 2일 성명을 내고 사과했다. 성명에는 "선곡자의 실수가 있었다"며 "해당 방송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 고통을 줬을 것이란 사실을 인정한다"고 했다. 이어 "과거 수년간 그래왔듯이 바그너의 곡을 틀지 않겠다는 칸의 방침은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 사과로 방송국 측은 이스라엘 내 바그너 옹호자들에게 또 다른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바그너의 견해와 작품 자체는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출신이기도 한 요나단 리브니 이스라엘 바그너협회 대표는 "그의 음악을 싫어하는 이들만큼이나 좋아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도 있다"며 "그의 음악은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BBC]]에서 했던 다큐에서 나온 표현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실크 태피스트리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이 졌다. 태피스트리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얼룩 또한 진짜다." 반유대주의 논란에 대한 관련 문헌들은 아래와 같다.(영어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2차 출처 기준) * Weiner, Marc A. (1997), 《Richard Wagner and the Anti-Semitic Imagination》 Lincoln (NE) and Londo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ISBN 978-0-8032-9792-0. * Katz, Jacob (1986), 《The Darker Side of Genius: Richard Wagner's Anti-Semitism》 Hanover and London: Brandeis. ISBN 0-87451-368-5. * Vaszonyi, Nicholas (2010), 《Richard Wagner: Self-Promotion and the Making of a Bra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51996-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